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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S INSIGHT

[허준이 교수]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by 에비안 2022.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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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인사의 축사 연설은 언제나 많은 인사이트를 선사합니다. 한국 최초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스탠퍼드대 수학과 교수가 서울대 졸업식에서 축사연설을 했습니다.  

 

학위 수여식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되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하거나 진부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이 나서 아니면 성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생활이 부끄러워서 15년 전에 이 자리에 오지 못했습니다만,  여러분은 축하받을 만한 일을 하기 위해서 이를 무릅쓰고 이곳에 왔습니다. 

졸업식 축사에선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요? 십 몇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보는 것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천 일, 혹은 다가올 몇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복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제 대학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있고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타협하지 말고 자기의 진짜 꿈을 쫓아라' 모두 좋은 좋언이고 사회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이 이미 고민해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그리고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준비, 결혼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준비를 거쳐 어디 그럴 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않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없이 맞이하게 되길 바랍니다. 

오래 전에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잘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가능한 여러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 하니 들튼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주시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허준이-박사-사진
허준이-박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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